안녕하세요. 오늘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신앙과 정치는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까요? 하나님나라에 속해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국가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정치나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합니까?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할 가치가 있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AD 390년 로마의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면서 시민 7천명을 극장에 모아 학살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밀란의 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난 비인간적인 만행을 놓고 황제를 강하게 책망하면서 그를 8개월간 파문하였고 이에 굴복한 황제는 그해 성탄절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통회자복하였습니다. 암브로시우는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서 교회의 감독은 신앙과 관련된 인간사에 대해 자유롭게 교훈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는데, 그 인간사에는 당연히 정치적인 일이 예외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세상을 가르치려고 할 때에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중세로 들어가면서 교회와 국가, 교황과 황제 사이의 힘겨루기가 진행되었고, 비숍이 군대를 갖는 등 중세 가톨릭교회는 세속권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와 뒤엉키는 그야말로 정치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는 가톨릭의 타락의 원인을 정치와 종교의 혼합이라고 규정하면서,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강조하여 교회는 정치의 일에 관여하지 말고 국가는 교회의 일에 관여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를 두왕국설이라고 말하고 있고 이후 개신교의 중요한 정치윤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톨릭의 정교혼합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루터의 두왕국설은 분리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치를 부정적인 죄의 산물로 보면서 이를 신앙의 범주에 넣지 않게 되었고, 결과로 정치적인 무관심과 무책임을 낳게 되었습니다. 개인 경건과 교회사역이나 선교에서는 열정이 있고 모범이 되지만, 사회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침묵 내지는 방조하고 나아가 지지하고 동참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에 거리낌을 갖지 않는 기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세대 뒤에 활동한 칼빈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한 곳도 없다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였고, 이것은 또 다른 정치윤리의 신학적인 토대가 되었습니다. 두왕국설이 국가의 역할을 단지 국민의 안전과 죄를 막는 것에 포인트를 둔 것과 달리 그는 하나님의 공의 실현을 국가의 중요한 과제로 이해했고, 이러한 과제를 바르게 이행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권을 인정했습니다. 이런 칼빈의 하나님주권설은 그리스도인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를 가능하게 하여 에른스트 트뢸취의 표현대로 스코틀랜드와 영국, 화란등의 서유럽에서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결실되었고, 독일에서는 나치시대 고백교회가 만든 바르멘선언의 신학적인 밑받침이 되어 기독교의 가장 모범적인 정치윤리의 근간으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짧은 기독교 역사에서 교회와 국가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3.1운동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그 이후 철저히 정교분리로 돌아서면서 정치적인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일관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교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던 교단의 지도자들은 일제와 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지지하면서 정치적인 편력을 보이는 이중성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무관심,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정치화를 경계하면서 건강한 정치적인 책임의식을 갖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제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