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안녕하세요. 전에 한 여성잡지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이면서 “사랑해 말순씨”라는 영화에서 데뷔한 배우 강민휘씨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비록 아들이 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특수학교로 보내기를 거부하고, 인내로 교육하면서 키워온 부모의 인간승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위에는 많은 장애인들이 있습니다. 유엔에서는 대략 사회인구의 10%를 장애인으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정부에 장애인으로 등록된 사람은 약 215만 명 정도이지만, 장애인단체는 약 400만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강민휘씨와 같이 좋은 부모 아래서 장애를 잘 극복하고 누구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실 소수이고 많은 장애인들은 사회적인 편견과 소외, 가난 그리고 구체적인 일상의 불편과 싸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국가정책이나 지원이 과거에 비해서 나아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 선진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우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장애인 복지의 발전은, 정치인들이나 행정당국자들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우리 비장애인들의 사고의 전환이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20년 전 헝가리에서 목회하시던 잘 아는 한 한국목사님이 부다페스트 근교의 한 장애인 시설을 방문하여 둘러보면서 크게 놀랐습니다. 헝가리 개혁교단에서 운영하는 이 장애인기관은 일반사람들이 사는 집보다도 훨씬 좋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에서 그 당시 장애인 시설하면 늘 후진 것만을 보아왔던 그는 이곳에서 일하시는 헝가리 목사님의 설명에 더욱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장애인들은 세상에서 우리보다 불편한 몸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한 몸을 가졌으니 이들보다 좀 불편한 환경에서 살아야 하구요”
당시 독일에 살던 저에게 이 목사님의 경험담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보쿰대학 옆의 크베어렌부르그(Querenburg)라고 하는 동네였습니다. 대학촌이다보니 기숙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 장애인을 위해 멋있게 지은 건물이 한 동 있었습니다. 이 기숙사 방의 일부는 비장애학생들에게 배당되었는데, 아주 인기가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장애인 기숙사는 일반 기숙사보다 훨씬 좋은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또 장애의 정도에 따라서 방과 서비스가 달랐고, 심지어 중증장애인학생에게는 24시간 사람을 세워 돌보게 했으니 한 중증장애인을 위해서 국가가 지불하는 돈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이런 복지는 정책을 실천하는 정부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낸 세금을 이렇게 쓰는 것을 당연시하는 국민의 의식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한국의 장애인 시설들은 대부분이 많이 낙후되어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사고가 그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몸과 마음이 불편한 자를 위해서 더 편리하고 안락한 시설을 제공하는 것 - 저는 이것이 바로 평균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보낸 두 번째 서신에서, 기근으로 인하여 큰 시련에 봉착한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위한 구제금을 부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삶의 질과 수준이 서로 다른 우리를 끊임없이 평균케 하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 평균케 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잘 실현되고 있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 속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조금 더 배려하고 조금 더 헌신하도록 합시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