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태어나고 또 죽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자연의 이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천이백여명이 태어나고, 육백칠십여명이 죽습니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도 신기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은 의식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이기에 더욱더 신비의 베일 속에 가려있습니다. 아무도 가 볼 수 없고 또 가보지 않은 곳이기에 죽음 뒤의 세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A. 까뮈는 죽음이란 닫혀버린 문과도 같은 것이기에, 죽음 다음에 또 다른 삶이 온다고 믿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죽음을 끔찍하고 추악한 모험이라고 말하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 뒤의 세계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거나 앙드레 지드와 같이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멸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육체에서 잘라 낸 영혼을 믿지 않는다. 나는 육체와 영혼과는 동일한 것이며, 육체의 생활이 이미 없어졌을 때에 양자는 함께 끝난다고 생각한다.” 과연 지드의 말처럼 영혼이 육체와 동일하며 육신의 죽음과 함께 영혼은 없어지는 걸까요? 이것을 과학이나 학문으로 규명할 수 없기에 결국 사람들은 철학이나 종교의 영역으로 넘깁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혼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스킨은 철학자들이 영혼이 있다고 인정을 하건 안 하건, 우리에게는 뭔지는 몰라도 꿈이며 이상을 심어주며 가치를 정해주는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이 딱딱한 육체만이 아니라, 그 안에 정신이 있고, 그저 정신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보다 더 숭고하고 신비한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존재를 과학으로 증명해보려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190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의 ‘말기 결핵환자 요양원’에서 대형 저울 위에 간이침대를 설치한 다음 임종을 앞둔 환자를 눕혀놓고 그가 죽는 순간 저울 눈금에 변화가 있는지 지켜봤습니다. 놀라운 것은 환자가 죽는 순간 몸무게가 4분의 3온스 즉 21그램이 줄었다는 것입니다. 실험을 주관한 의사는 영혼이 육체를 떠났기 때문에 몸무게에 차이가 난 것이라고 하면서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실험은 사실 별로 과학적이지도 정밀하지도 못했지만, 후에 “21그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정말 영혼의 무게가 21그램일지, 아니면 “천사에게 체중이 없듯이 영혼에는 무게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한 게오르규의 말대로 무게가 전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고, 그 영혼이야말로 우리 인간을 동물과 구분하여 숭고한 영적 존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성경은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심판이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 삶을 계산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오염된 우리 모두에게 이 시간은 별로 유쾌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죽어봐야 알지”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위안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요, 그러기에는 죽음이란 것이 너무 두려운 것이 아닙니까? 너무 늦기 전에 죽음을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