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 선거를 앞둔 한국교회의 과제”

 

[이 글은 2012년 3월8일 서울 성락성결교회에서 열린 한목협 열린마당의 논찬 내용을 수정하여 3월12일 부산중앙교회에서 부산기윤실주최로 열린 세미나 "그리스도인 어떻게 선거와 정치에 참여할것인가"에서 발표하였고, 월간고신에 게재되었습니다.] 

 

선거의 해를 맞이하여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와 정치의 관계에 예민해 있다. 과거에 비하면 많은 변화임에 틀림없다. 20년 전만해도 대부분의 교회는 정치사회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3.1운동의 실패이후 견고한 현실정치의 벽을 실감한 교회는 내세화, 내면화되었고, 이것이 선교사들을 통해 전수된 정교분리이론과 맞아떨어지면서, 점차로 사회 구조적인 문제는 믿음의 영역에서 제외되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정치적 태도는 두 차례 진보정권을 거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정교분리의 기치아래 명분상으로는 정치적인 중립을 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보수정권의 후견인 역할을 했던 교회들이, 사회 내 진보적인 정치세력의 약진에 두려움을 느끼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행보에 나선 것이다. 정권비판적인 발언을 쏟아내고, 반정부집회를 갖고, 지난 선거에는 장로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발 벗고 나서더니 이번에는 아예 기독자유민주당이라는 기독정당까지 결성하여 선거에 나서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데 앞장서는 교회지도자들은 정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가운데 교회에서나 통하는 언어로 일방적인 주장하면서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의 비웃음과 조소의 대상이 되면서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고 있다. 나아가 우리 사회의 많은 교인수와 기독교의 영향력을 자신들의 권력욕에 오용하려 함으로 한국교회는 이제 정치적인 무관심과 탈사회화의 문제에서 오히려 교회 정치화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양대 선거는 교회들에게 어떤 올바른 자리매김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여기서 정치공동체 속에 살아가는 한국의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를 몇 가지 짚어보고 싶다.

 

첫째로 정치공동체에서의 책임의식에 관한 지속적인 교육이 중요한 과제이다.

선거를 맞이하여 이러 이러한 자세를 가지고, 이런 후보를 선별하라는 식의 교육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이렇게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살피는 근본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 사회 자체가 아직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정치적인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유감스럽지만 이번 선거 역시 그러한 면모를 보게 될 것이다. 정책차별이 아닌 지역차별에 기반을 둔 정당들, 민의가 제대로 수렴되지 못한 공천, 지켜지지 못할 공약(空約)이 난무하고, 인신공격과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폭로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맥과 지연 학연에 끌려 표를 찍어주는 유권자등...

유감스럽게도 교인들 역시 이런 정치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 나아가 대부분의 교인들은 여전히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국가정치에 대해 무관심한 가운데, 목회자들의 정치이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로 인해 정치공동체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예언자적인 기능은 둘째 치고, 건전한 시민으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감당치 못하여 오히려 정치발전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점에서 어떤 구체적인 정치행위에 대한 방법론적인 접근 이전에, 국가와 교회의 관계,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책임에 관한 통전적인 가르침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본다.

우리나라의 정교분리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루터의 두왕국설은, 중세 가톨릭에서 교회가 정치권력을 향유하고 정치가 교회의 일에 간섭하는 그릇된 혼합 상황을 질타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역할 구분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 두왕국설에서 교회(영적정부)는 복음으로, 국가(세상정부)는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기관으로 구분함으로 교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분리시켰다.

이런 분리가 만들어낸 이원론적인 사고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교회 밖의 세상에 대해서 무관심과 무책임하면서 탈사회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하였다. 정치는 필요악의 어둡고 추잡한 세계로 경건한 성도의 믿음의 영역에서 제외시켰다.

아울러 토마스 뮨쩌의 농민전쟁을 반대하면서 제후의 편을 들었던 루터의 영향으로 국가권력에 대한 순응을 강조했고, 국가의 기능을 사회질서와 안녕을 지켜주어 교회가 평안 가운데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단순화시켰다.

이러한 단순한 국가관은 18세기 이후 국민주권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외연적인 정치성향을 보수적이 되게 만들었고, 국교제도, 성직자의 관료화는 교회로 하여금 국가의 현 체제의 중요한 후견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종교사학자 트뤨치(E. Troeltsch)는 20세기 초 독일정치의 후진성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루터신학의 전통에 기인한다고 하면서, 반면에 영국이나 프랑스 화란등의 서유럽은 칼빈주의로 말미암아 정치민주화에 훨씬 앞서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국가와 교회 이 두 영역을 철저히 분리하려고 했던 루터와 달리 칼빈은 이 두 영역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분리된 성격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의 통일된 연관성 속에서 보고 있다. 기독교강요 제 4장 20항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는 국가를 교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리의 도구”(IV, 20.6)로 그리고 통치자나 관리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과 통치의 종”으로 이해했다. 정치적인 직책이란 “인간 타락”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거룩한 위임”(IV, 20.4)의 작품이므로 정치적인 삶을 더러운 것을 취급되어서는 안된다.(IV, 20,2) 도리어 좋은 정치는 “우리가 세상에서 얻는 그 어떤 것보다도 탁월하고 훌륭한 은사”인 것이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결코 상호 모순관계에 있지 않다”(IV, 20,2)고 보면서 정부나 정치의 모든 영역이 믿음과 무관하다라는 것을 오히려 사단적인 생각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서는 루터의 두왕국설에서 야기된 탈정치나 이원론적인 내면화 내지 정치적인 무관심을 초래하지 않았다.

아울러 칼빈은 불의한 통치자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적인 저항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는데, 이러한 사고는 개혁주의로 하여금 루터주의와 달리 반동적이거나 보수적이기보다는 변혁적이고 진보적인 성격을 갖게 하었다. 한스 숄(H. Scholl)은 이 부분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절대주의적인 성향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은 무엇보다도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일어났다. 서방의 모든 정치적인 발전은 이것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칼빈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진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독일의 바르멘선언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된다. 루터주의 두왕국설이 나치의 신학적인 후견세력인 독일 그리스도인를 만드는 동안, 개혁주의는 나치에 저항하는 바르멘선언을 만들었다. 나치에 저항하는 고백교회의 신학적인 뒷받침이 되었던 이 바르멘선언은 전쟁 후에도 독일교회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한 교과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개혁주의인 장로교회는 선교사들을 통해서 정교분리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오히려 루터의 두왕국설과 유사한 경향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는 칼빈 신학의 진정한 사회윤리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둘째로 정치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사실접근이 중요한 과제이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정치를 정치 이상으로 보는데서 기인한다. 정치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는 영원한 것, 완전한 것이 아닌 불완전하고 상대적인 것들이다. 교회는 자칫 특정한 정치적인 이념을 절대시하고 심지어는 영화(靈化)시키는 우를 범하기 쉽다. 다분히 자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경해석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정치적인 신념을 하나님의 뜻 내지는 선으로 규정한다. 반면에 자기 반대편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악으로 정죄하거나 심지어는 그 배후에 마귀의 역사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런 사고의 틀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와 대화는 불가능하게 되고 오히려 상대방은 제거해야할 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바르멘선언 제 5항은 “국가는 인간적인 통찰과 인간적인 능력을 따라서 경고 내지는 공권력 행사를 통하여 공의와 평화를 지켜야 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정치가 인간적인 통찰과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서 형성 수행되므로, 정치적인 이론이나 결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가치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선과 악이 아닌, 더 나은 선과 모자란 선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정치이성의 상대성과 불완전성으로 인해서 권력은 분립되어 상호 견제해야 하고, 여당과 야당이 있어야 하며, 다른 이론에 대한 열린 마음, 비판과 타협의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진리 이외에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서 자기 사상의 아집에 갇힌 자들을 대화의 자리로 불러 사회적 평화를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스스로 정치사상을 우상화하면서 사회적인 갈등과 분열의 원인자가 되고 있다.

나아가 베이컨의 우상들처럼 교인 속에 형성된 정치적인 편견은, 그들로 하여금 정치사안의 객관적 사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팩트(fact)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여는 지금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어떤 정치적 사안이 이슈가 될 때에 나와 다른 정당이나, 정치주장에 대해서 충분한 사실 이해를 갖고 받아들일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선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가 좌파사상이므로, 꼴통보수이므로 덮어놓고 반대하는 것이다. 반대할 뿐 아니라, 누군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불경하거나 신앙에 문제 있는 사람으로 낙인찍는다. 이런 것은 일종의 정치과잉현상이다. 우리 사회나 교회에 아직도 선동적인 정치인들이 먹혀들어가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치과잉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모든 정치적인 편견을 내려놓고 팩트를 말하고 팩트에 접근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목회자부터 그런 태도를 갖고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순종의 자세와 아울러 상대적인 다양성에 대한 수용과 분별할 수 있는 비판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정치적 방향성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이다.

세상정치는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이념을 형성하면서 집단화하고 정치세력화 한다. 그런 정치이념에 따라 당을 세우고 선거를 통해서 집권하려는 목표를 갖게 된다. 대의민주정치에서 우리 역시 어떤 정당이나 후보자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세상 정치의 밑바닥에는 그 기초가 되는 다양한 이론과 이념이 있지만, 그 어떠한 정치이념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담을 수는 없다. 그것이 반공이건, 반미건, 우파건 좌파건 기독교적인 가치와는 거리를 갖고 있다. 반공도 반미도 기독교적인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정치이념에 우리의 틀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한 기독교적인 가치는 모든 정치 프레임 속에 담긴 다양한 가치를 판단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근본적으로 사회비판적인 자리에 설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모든 사회 정치이론과 행위들을 판단할 척도 즉 기독교적인 가치가 무엇인가에 귀착된다. 당연히 우리는 그 근원을 성서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기독교인들이 성경에서 현실정치에 실현할 원리를 직접 도출해 내려고 하는 위험이다. 이런 문제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메시아니즘이나 신정정치, 근본주의의 모습으로 수없이 나타났고,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심심치 않게 선포되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 반대의 위험도 있다. 이미 자기 속에 고착된 정치이론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성경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쉐롱(D. Schellong)은 드 보날드의 예로 이런 문제를 지적한다. 그는 프랑스혁명을 비난하고 과거 신분제도로의 복고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삼위일체를 끌어들였다 :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므로 그것을 근거로 세상에는 세 개의 신분을 있어야 한다. 고로 이 신분의 질서를 파괴한 프랑스혁명은 불의한 것이다’ 드 보날드에게 있어서는 복고정치의 정당성이 이미 전제가 되어 있었다. 삼위일체는 이러한 정치이념을 공인받기 위해 오용한 것에 불과했다.

이런 문제는 보수적인 그룹뿐 아니라, 제 3세계의 정치신학등 진보적인 그룹에서도 유의해야 할 점이다. 민족, 민중해방을 절대선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회정치적인 눈으로만 해석하려고 함으로 자신들의 정치이론을 뒷받침하는 정치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이다. 그 말씀 속에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정치 사안보다는 국가가 지향해야할 일정한 방향과 지속적인 노선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을 얻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일방적이고 연역적 원리에서가 아니라, 정치의 통전성 속에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인간적인 통찰과 인간적인 능력에 의해서 세워진 정치세계의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성서에는 국가를 세상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국가이해가 담겨져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사회정치적인 원리를 도출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정치의 눈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또한 현실정치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정치현상이나 이론을 갖고 성경을 새롭게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정치학자들이 함께 모여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처럼 두 영역의 상호작용이 반복되면서 성경과 정치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넓어지고, 점차로 공허한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방향과 노선을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후버(W. Huber)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성경을 갖고 “단순한 연역적인 도식이나 또는 반대로 현실상황에 종속된 결정론”을 따르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기독교적 정치윤리는 정치공동체가 갖는 다양한 프레임의 가치방향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독교적 가치를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정치적인 정황 속에서 찾아가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중요한 과제이다.

 

기독교정치인이란 교회의 직분을 가지거나 교회에 적을 둔 정치인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기독교적인 가치를 정치영역에서 실천하려는 정치인이다. 이번 선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후보자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갖고 선택하기 보다는 이러한 기독교적 가치에 얼마나 가까운 정책과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냐를 갖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적인 정치행위는 기독교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독교적인 가치를 사회 속에 실현하는 일이다. 정치인으로 나서거나, 그런 정치인을 선출하거나, 또는 이러한 잣대를 갖고 사회비판적인 자리에 서거나간에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는 국가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세워가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믿음의 행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