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제목 : 용산 철거민 참사사건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오늘은 용산철거민참사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1월 20일 용산 4구역 재개발 현장 한 건물에서 철거에 항의 하는 철거민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1명의 경찰관을 포함하여 6명의 사상자를 낸 엄청난 사건이 도심 한 가운데서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검찰의 수사결과를 바라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 착잡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너통을 들고 화염병을 던져대는 철거민들의 모습도 그렇고, 무슨 대단한 위험이 야기되는 상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과 농성 하루만에 그것을 제압하기 위해서 무리하게 작전을 펼치면서 큰 희생자를 낸 공권력을 보면서도 답답합니다.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온갖 문제들이 다 압축되어 있는 사건이 아니었나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회의 법을 어기면서 남을 해치는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옳다고 두둔할 수 없습니다. 사회의 질서와 공공의 안녕을 위해서 공권력은 적절히 행사되어야 합니다. 법과 원칙은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법과 원칙의 차원만으로 이 사건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 농성자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도 이 상가에 세 들어 장사하는 그저 우리와 꼭 같은 상식을 갖고 살아가는 평민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이처럼 극렬한 저항을 선택하게 만들었는가 - 이에 대한 이해를 간과하면서 누구의 옳고 그름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시재개발이라고 하는 것에는 많은 무리와 갈등이 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주민이나 세입자들 중에도 이것을 기회로 한몫 잡자고 하는 나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나 재산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저항하기 마련입니다. 상가 세입자의 경우는 시설비나 권리금등이 고려되지 않음으로 인해서 삶의 터전을 고스란히 빼앗길 수 있습니다. 부산의 서대신 1구역의 경우 오랫동안 살아온 무허가입주자들에게 평수와 관계없이 겨우 4백만 원을 내주고 철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돈으로 어디에 가서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렇듯 철거민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결여된 채, 사업자와 일부 땅 주인만이 거대한 이윤을 남기는 재개발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이런 극한 분쟁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억울한 약자를 양산해 내는 제도 하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을 법과 원칙을 중시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공권력으로 다스리려고 하는 것도 정부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아울러 이번 불행한 사태의 밑바닥에는 “빨리 빨리”라고 하는 우리들의 조급증도 깔려있습니다. 그저 이해관계가 맞는 다수의 사람과 협상을 하면 나머지는 용역을 동원해서 폭력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사업자의 자세도 그렇고, 빨리 농성자를 제압하겠다고 나선 경찰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도코의 롯본기 6가는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된 후 지속적으로 주민들과 대화하고 설득하여 12년만에 재개발조합설립신청서를 도쿄도에 제출했습니다. 주민들의 90%가 찬성하였지만, 시는 미가입한 30여 가구를 소홀히 보지 않고 가입률을 좀 더 높이라고 요구하여 8개월 뒤에야 조합인가를 내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우리에게는 대화를 위한 인내가 조금 더 필요합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재개발이란 것이 언제나 땅을 노동이나 주거의 개념보다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주도된다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땅의 원주인인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거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공동체에게 땅을 공정하게 분배하여 모두가 살 수 있도록 하셨고, 희년마다 땅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어 사회적 약자가 살 수 있도록 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런 제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을만큼 창조주의 뜻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와 있습니다.
이번 용산 사건이 단순히 표피적인 책임공방에 머무르지 말고 우리 모두가 보다 본질적인 반성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국가는 앞으로 억울한 약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제도적인 배려를 하는데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