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안녕하세요. 오늘은 독일통일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의 통일문제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지난 9일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그광장에서는 동서독장벽붕괴 20주년을 맞이하여 성대한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이 장벽이 무너짐으로 분단국가였던 독일은 다음해 10월 3일 통일을 이루었고, 통일이후 지난 19년간 동서간의 극심한 격차와 갈등에도 불구하고 사회통합 작업을 착실하게 일구어 안정된 나라로 안착시켰습니다. 이로 인하여 독일은 인구 8천만의 강한 국가로 새롭게 거듭나면서 유럽을 넘어서 세계에 강력한 리더십을 행사해가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통일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20년 전 먼저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과 그 이후의 사회통합과정에서의 성공과 실패들은 한편으로는 좋은 교본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면교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결정적인 계기는 당시 동독 정부 대변인인 귄터 샤보브스키가 “일반인들의 여행 제한을 해제할 방침”이라는 정치국의 결정을 놓고 기자들에게 “(이 방침을) 즉시 시행한다”고 잘못 설명한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들은 서독으로 몰려들었고, 베를린 장벽은 그 순간 역사의 유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통일이 이러한 해프닝으로 갑자기 찾아왔다기보다는, 오히려 오래전부터 통일을 준비하는 서독인들의 노력이 꾸준히 이어져왔고, 이를 통한 통일의 여건들이 무르익어갔을 때에 그 열매를 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서독은 두 차례 세계전쟁과 유대인 대학살의 과오를 자각하고 철저한 반성을 통하여 과거사청산작업을 실행에 옮겼고, 확고한 평화 의지를 보이며 우선 미국, 영국, 프랑스등 서방의 신뢰를 회복하였습니다.
아울러 빌리브란트수상이후 동방정책을 앞세우며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브란트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바르샤바 전쟁희생자 위령탑 앞에 무릎을 꿇은 사건은 화해를 위한 독일의 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뢰회복을 위한 독일의 외교적인 노력은 마침내 때가 왔을 때에 서방의 우방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동독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고르바초프의 동의와 승인을 받아냄으로 통일이라는 거대한 결실을 일구어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국가들과의 관계발전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서독인들의 통일을 위한 오랜 노력과 인내입니다. 특별히 독일통일에 있어서 서독교회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선 서독의 서너개 교회들이 동독의 한 교회를 유지시키는 시스템으로, 동독의 교회를 돕는 일에 각 교회가 재정적인 헌신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나아가 정부와 협력하여 보다 깊은 통일사역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최근 우리나라 통일부장관이 독일의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본받아 북한의 납북자나 국군포로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Freikauf는 1963년부터 서독이 서독 일인당국민 소득의 5~12배 되는 돈을 지불하여 동독의 반체제인사 한 사람을 사오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위해서 서독은 총 2조7천억원에 해당하는 현금과 물자를 동독에 지불했습니다. 양쪽 정부당국자가 이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것이 불편하므로 교회라는 통로를 이용했고 교회는 이 제의를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현금과 물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돈들이 동독으로 들어가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겠지만, 독일인들은 통일을 향한 장기적인 눈을 갖고 다방면의 교류를 위한 값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비록 우리와 여건은 다르지만, 통일을 이루는 데는 멀리 내다보는 안목, 그리고 꾸준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만큼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통일을 위해 기도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독일 교회와 같이 우리 교회들도 통일을 위해 더욱 많이 기도하고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