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에 한 성화를 감명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제목이 “은배” 인지 “성의”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제목이 말해주듯이 예수님이 쓰던 잔이나 입던 옷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저 잠깐 스쳐지나간 장면이 깊은 인상으로 남겨졌습니다. 한 소아마비 소녀가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동네 아이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러자 개구쟁이 아이들이 짓궂게 묻습니다. “너는 예수를 믿었는데 왜 여전히 걷지도 못해? 네가 예수를 믿어서 달라진 게 뭔데?” 그러자 그녀는 대답합니다. “그래 나는 여전히 두 다리가 불편해.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내 마음은 기쁘고 감사해. 이것이 내가 달라진 것이야”

   확실히 성경에는 주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에서 치료되어 건강을 회복한 많은 사람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는 모습은 감동적입니다.  지금 역시 세계 도처에서 이러한 이적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병이 치료되고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사업에 성공하여 많은 물질을 얻게 되고, 죽음의 위기에 서있던 자가 주의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받은 드라마틱한 간증을 듣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시 한번 깨닫고 경배하며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또 다른 쪽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케도냐 교인들은 수많은 시련과 가난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치유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기쁨이 넘쳤고, 극한 가난 속에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다고 했습니다.(고후8:1,2) 단 몇 절로 간략히 소개되는 이들 교회의 모습은 성경에 나타는 어떤 교회들보다도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들을 이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찬양과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만일 그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중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방법으로 고통스러운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풍부한 물질을 주셔서 가난을 벗어나게 해주셨다라고 한다면 이 감동은 훨씬 덜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치료받아 나은 자의 찬양보다도 치료받지 못한 자가 불편한 몸으로 부르는 감사의 찬양에 몇 십 배의 감동을 느낍니다.  여전히 가난한 가운데서 지족하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정말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은혜와 능력을 맛본 자가 아니겠습니까. 남이 볼 때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거기서, 오로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 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예수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그 입술의 찬양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찬미의 제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