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이웃도시에서 사역하는 김목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잘 아는 형제가 그 교회에 특강을 하기 위해서 왔으니 같이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미 독일에 오기 전부터 잘 알던 이 형제는 정신과 의사로 일하다가 신학을 배우고 싶다며 늦은 나이에 미국에서 유학하는 중이었다. 반갑게 만난 우리는 그 도시의 자장면 잘하기로 소문난 한국식당으로 갔다. 그런데 다른 교회의 여집사였던 식당 주인은 김목사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 주문한 자장면이 나오는데 양이 많아 보였다. 주인은 “목사님 일행이기에 자장면에 면을 더 넣었으니 많이 드십시오.” 라고 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형제가 갑자기 화를 내면서 말했다. “목사님이라고 색다르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렇게 하니까 한국교회에 문제가 많은 거예요.” 그러자 이 갑작스러운 비난에 여주인 역시 발끈하며 대꾸했다. “아니, 내가 좋아서 목사님들에게 면을 좀 더 드린 게 뭐가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원 참 별 얘기를 다 듣네.” 갑자기 약간 살벌해진 분위기에서 두 목사는 죄인 아닌 죄인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가 주인이 간 뒤 형제에게 “됐어. 그만해요” 하고는 대화의 주제를 돌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오랜만에 먹는 자장면이 정말 기가 막히게 맛있긴 했지만 좀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목사라고 특별히 대우하려는 것, 목사라고 특별히 대우 받으려는 것 - 이것이 이 고지식한 의사의 눈에 비추인 한국교회의 문제점이었다. 그의 좀 융통성 없어 보이는 행위는 차치하고, 또 목회자를 좀 더 대접하고 싶어 하는 교인들의 따뜻한 마음은 차치하고라도, 오늘날 목회자의 특권 내지는 특권의식의 병폐를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는가. 교인들 가운데 별의별 직업을 가진 사람들, 각계각층의 사람들, 심지어는 사회에서 힘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있고 또 이러한 교인들이 목사를 존경하고 깍듯이 대하면서 온갖 편의를 봐주려고 하다보니 목회자는 알게 모르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뭘 부탁해도 고분고분 들어주려는 교인들이 있기에 심지어는 법과 상식을 어기는 자리에 까지 나가려고 한다. 주의 종이 아니라, 주의 종님으로 높이 대접받으면서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 주님의 후광을 입고 이런 저런 것을 누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야 있지만, 나를 비롯해서 알게 모르게 이런 잘못을 범하고, 이런 그릇된 생각에 빠져보지 않은 목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날 맛있는 자장면을 먹으면서 좀 찜찜했던 것은 자장면에 면을 조금 더 얹어 대접하는 정도는 문제 삼으려 하지 않았던 나 역시 이 올곧은 형제의 눈에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목사로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였으리라.
목회자에게는 분명 특권이 있다. 그 특권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고 가르치는 것이고, 모든 시간을 교인들과 교회를 돌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특권으로 지족할 줄 아는 목회자가 바른 목회자 일 것이다.
그 해 겨울 아내의 생일에 맛있는 자장면을 맛보게 하고 싶어서 다시 이 식당을 찾았다. 역시 아내는 오래간만에 먹는 맛에 감탄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주인은 내 얼굴을 잊고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면이 더 얹어져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빙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양이 딱 맞아. 면이 더 있었으면 뱃살로 가는 거 아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