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얼마 전 멜 깁슨 감독의 영화 “예수의 수난”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상영되었다. 로마교황이 이 영화의 예수 역으로 나온 짐 카비에젤을 이례적으로 영접하고 축복함으로 이 영화가 로마 카톨릭의 관점에서는 잘 만들어진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이 영화에 대한 찬사도 많았지만, 반면에 비판도 많았다. 그 비판의 핵심 중에 하나는 예수의 수난을 너무 적나라하게 묘사했다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반유대주의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수난과 관련된 지나치게 잔인한 장면들로 인해서, 일반 대중 뿐 아니라 교인들에게조차 영화의 뒷맛이 좀 씁쓰름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것과 반유대주의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나라사람들에게는 쉽게 공감 가지 않는 주장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의 소리가 유럽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우리와 달리 이들의 역사 속에 반유대주의가 얼마나 큰 상처인지,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홀로코스트(유대인대학살) 이후 유럽사회는 철저한 반성의 시간을 맞이했다. 그 반성은 정치사회적, 이념적, 문학적, 철학적 분야에서 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지금까지 교회가 지향한 신앙에 대한 돌아봄의 계기가 되었다. 교회를 비롯한 유럽사회는 이 엄청난 재난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왜곡된 모습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 있었는가? 이러한 반성은 수많은 아픔으로 다가왔지만, 새로운 사회를 형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지향점의 핵심은 평화였다.
중세유럽의 반유대주의
유럽에서의 유대인의 역사란 수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 수난의 가해자 편에는 기독교인들이 서 있었다. 기독교인들 속에 형성된 반유대주의의 역사를 짧은 지면으로 다루기는 어렵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만 해도 사도와 전도자들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얼마 가지 않아서 역전되고 말았다. 폐쇄적인 유대교와 달리 전도와 선교를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삼는 기독교는 점차로 로마사회를 점령해 갔고 마침내 313년 밀라노칙령을 통해서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었다.
이후로 로마를 침략한 게르만족을 비롯한 유럽의 이방민족들이 복음화 되었고,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전체가 소위 기독교사회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기독교사회 속에서 교회는 자연히 가공할만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교회의 징계는 사회의 징계를 의미하였다. 수찬정지와 출교는 바로 그 사회에서의 단절과 추방을 의미했다. 성직수임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카놋사의 굴욕사건은 교회의 수장(그레고리 7세)이 국가의 수장(하인리히 4세) 위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이런 획일적인 종교 사회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이 당해야 했던 수난이 어떠했을까는 누구나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마치 지금 이슬람 원리주의를 따르는 나라들 속에서 누군가가 이슬람을 거부하고 타종교로의 개종한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중세의 유대인들은 지역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종교적인 사회적인 소외 속에서 게토(Ghetto)를 이루며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야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 속에 박힌 유대인들에 대한 미움은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이 예수를 죽였고,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을 핍박하였다는데 기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미움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밀라노칙령 이후 기독교가 더 이상 초대교회가 지향한바 사랑을 근거한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국가와 사회의 틀 안에서 변질되어 버린데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F. 베른쉬타인은 반유대주의의 근거로 유럽에서의 기독교신앙이 오랜 시간 거대한 “기독교적 국민”과 “기독교적 국가”에 사로잡혀 있었던 점을 지적한 것이다. (RGG 3.Aufl. I, S.458)
근대유럽의 반유대주의
15세기부터 일어난 종교개혁이 유대인들의 신분에 어떤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종교개혁의 중심인물인 루터는 유대인을 선교해야한다는 생각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유대인을 적대시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이 점에서 칼빈 역시 루터와 큰 차이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장기적으로 유대인들로 하여금 소외의 틀을 벗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로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종교적으로 획일적이었던 유럽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카톨릭교회 이외에는 결코 발을 디뎌놓을 수 없었던 유럽에 개신교가 등장하였다. 두 종교의 극심한 갈등은 마침내 수많은 유럽 국가들이 참여한 30년 전쟁의 비참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전쟁을 마감하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은 새로운 유럽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 최초의 국제조약은 두 개의 종교가 유럽에서 공존하게 됨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세를 지배하던 단일사회의 종언이었고, 새로운 사회적 관용이 싹 트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물론 이 조약에서 배제된 일부 개신교그룹들과 유대인들은 여전히 소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유럽 사회 속에서 일어나기 시작하는 다원화로의 길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계몽주의, 인본주의와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일어난 세속화는 이러한 사회적인 다원화현상을 가속시켰다. 이것이 유럽의 유대인들로 차츰 숨을 쉬면 기지개를 켜게 하는 외적환경이 되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유대인들 역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미 중세시대에도 이슬람이 지배하던 지역들 특히 바빌로니아 지역이나 일부 스페인 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훨씬 자유로운 환경을 아래서 그 사회와 공존하면서 유대교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에서는 그 사회와 담을 쌓는 게토의 성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이러한 게토생활 속에서 분리주의와 내세주의가 유대인들의 사고와 삶의 성격이 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의 발달과 함께 새로운 경제적 기회들이 무수한 가능성들과 필요들을 창출시키던 18세기가 되면서 점차로 유대인들은 유럽의 언어들과 풍습 그리고 생활양식들과 접촉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런 경제적인 변화에 재빨리 적응한 유대인들은 은행가와 상인, 군 식량 조달업자로서 성공했고, 공장을 세우거나 자본을 대는 유력한 자본가들도 나타나면서 사회에 영향력 있는 유대인들이 되어 갔다. 그들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단절한 이 이방인 사회에 들어가 완전하게 인정을 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게토의 종말을 외쳐대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생겨났다. 소위 계몽된 유대인이 되어 유럽의 사회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이 기지개를 켜고 사회 속으로 들어가자 그들의 숨겨졌던 잠재력은 장사와 학문과 과학의 세계 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들과 교수, 예술가 문인들이 나오고, 재치 있는 장사꾼들은 각 도시마다 상권을 쥐면서 영향력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들은 서서히 관료와 정치계에 까지 뻗어 나갔다.
그러나 이들의 점증하는 사회적인 영향력은 유럽인들 속에 내재하는 반유대주의의 감정을 다시금 자극해 갔다. 유대인들이 특히 많이 살았던 러시아의 경우 1881-82년 그리고 1905년 두 차례에 걸쳐서 유대인에 대한 잔인한 학살이 일어났다. 당시의 제정러시아정부와 정교회는 이 사건에 묵인 내지는 조장의 자리에 서 있었다.
1894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드레프스 사건은 반유대주의가 사회변화의 갈등에 맞물려서 분출된 대표적인 것이었다. 부유한 유대인의 가정에서 자라난 드레프스는 육군대위로 육군부에서 근무하다가 독일과 내통했다는 간첩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충분한 자료제시도 되지 않은 채 진행된 재판에서 그는 악명 높은 악마의 섬이라는 수용소에서 종신토록 살도록 선고받게 되었다.
이 사건을 두고 재판결과를 찬양하는 반유대주의적 언론들과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졸라를 비롯한 자유주의자들 사이의 대결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서 한편으로는 프랑스 내에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지속되어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주어졌고,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에 굵은 획을 긋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서 민주주의가 뒤쳐졌던 독일사회에서는 1차대전 이전에도 인종주의가 공공연히 주장되면서 이와 편승해서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1차대전의 패배와 왕정에서 바이마르 공화정으로의 전환은 독일국민들에게 많은 혼란과 두려움을 야기 시켰다. 자주 바뀌는 불안정한 정권과 취약한 경제구조, 승전국이 요구하는 부채와 외교적인 억압 등등은 도리어 더 강한 민족주의를 키우고 있었다.
이 틈을 타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정당(나치)은 민족감정을 선동하면서 외국에 대한 적개심을 자극했고, 독일국민들 속에 잠재된 반유대주의를 정당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마침내 이 선동적인 정당이 1933년 집권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유럽 전체의 파국의 시작이면서 아울러 유대인들의 극심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나치정권하에서 독일과 또 독일점령의 온 유럽에서 유대인 사냥이 전개되었다. 먼저 독일인과의 결혼이 금지되고 무효화 되어 가정에서 쫓겨났으며, 그들의 가게는 약탈되고 재산은 몰수되었다. 직장과 교회에서조차 내몰리더니 마지막으로 붙잡혀서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용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엄격한 규율아래 중노동에 시달리며 기아로 병으로 하나씩 죽어갔다. 많은 유대인들은 살아서나 죽어서 나치의 의학연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차례차례 살해되어 약 6백만명의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사라져 버렸다.
히틀러의 친위부대(SS)부대를 지휘한 히믈러의 말은 인간성 상실의 밑바닥을 보게 해준다. “너희 중 대부분은 시체 100구가 쌓이거나 500구 아니 1000구가 쌓인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이 일을 진행해가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결코 기록되지 않은, 아니 기록될 수 없는 명예로운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이다.”(하인리히 히믈러 1943년 10월 4일,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Band XXIX, Nuernberg 1947)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
물론 이런 끔찍한 대학살은 SS에 의해서 은밀히 진행되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반유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나치의 반유대 정책에 동조하거나 침묵을 통해서 방조함으로 이 큰 죄악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한 것이다. 전후 끊임없이 제기된 독일국민의 집단범죄(Kollektivschuld)에 대한 논의는 하버드대학의 Goldhagen이 박사 논문으로 미국 내에서 큰 찬사를 받은 “Hitlers Willing Executioners”로 인해 1996년 다시 한번 크게 붉어졌다.
무엇보다도 홀로코스트로 인해서 서구의 교회 그 중에 특히 독일의 교회와 신학은 가장 큰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교회는 나치의 통치 하에서 저항하지 않고 국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들 중에 극단적인 그룹은 소위 독일그리스도인(Deutsche Christen)을 만들어서 나치사상과 기독교의 일치를 꾀하면서 유대인 박멸에 앞장섰다. 이들은 구약을 비롯해서 유대인들의 색채가 많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성경 등을 폄하하였다. 이런 극단적인 그룹은 아니더라도 독일의 대부분의 보수적인 신앙인들은 그들의 신앙 속에서 반유대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들에 반대하고 나치에 저항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니묄러, 부름, 마이어등의 목사들과 바르트, 본회퍼 등의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한 소위 고백교회였다 (Bekennende Kirche). 이들이 중심이 되어 발표된 바르멘선언(1934)은 지금까지도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신학적인 지침서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선언에서조차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정책에 저항하는 내용은 언급되지 못했다.
본회퍼연구가인 E. Bethge는 당시 이를 적극적으로 주장한 본회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설명하면서 이것을 바르멘선언의 약점으로 지적하였다. (EK 7(1974) 405-408) 종전 후 교회는 슈투트가르트선언(1945) 그리고 다름슈타트선언(1947)등을 통해서 포괄적으로 나치 하에 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죄를 고백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은 교회 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정치사회, 철학, 문학, 의학, 교육 등의 전 영역에서였다. 비단 독일에서 뿐이 아니었다. 모든 양식 있는 지성인들은 유럽의 오랜 역사 속에 깊은 뿌리를 갖고 있는 반유대주의에 대해서 반성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 역시 반유대주의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으로 홀로코스트에 드러난 폭력과 인간성말살에 대한 고발로 이어졌다.
아우스비취 못지않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터진 원자폭탄의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과학과 학문의 발달을 자랑하며 사회적인 진보를 꿈꿔온 서구사회의 허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아우스비취에서 히로시마”까지 라고 하는 표어는 전쟁, 폭력, 인종주의가 빚어낸 비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었다. 그것은 또한 오랫동안 유럽의 정신적인 지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시 때때마다 국가 이데올로기에 끌려갔던 기독교에 대한 반성이기도 했다.
이러한 반성의 작업은 점차로 유럽사회의 화두를 “평화와 인권”이라고 하는 것으로 몰고 갔다. 그들은 이제 평화를 원했고 그 무엇에 의해서 희생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했다. 그것은 두 차례의 큰 전쟁과 육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이 가르쳐준 값비싼 교훈이었다. 다원화된 가치관에 대한 인정과 아울러 평화로운 공존을 위해서 관용은 유럽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 윤리적 척도가 되었다.
이스라엘 비판과 반유대주의 사이의 미묘한 갈등
오늘날 유럽은 유대인들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정책에 대한 비판과 반유대주의 사이에서 힘겨운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눈에 중동은 세계에서 가장 평화를 위협하는 곳으로 그 중심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놓여져 있다.
1993년 팔레스타인의 아라파트와 이스라엘 노동당 출신의 총리 라빈 사이에 극적으로 체결된 오슬로 협정에 따라 평화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으나, 라빈총리가 암살당하고 보수정당인 리쿠드당이 다시 집권함에 따라 팔레스타인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이스라엘정부의 보복공격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여기에 민간인들의 희생이 늘어나고 오슬로협정의 정신은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미 오랜 세월 폭력과 전쟁에 시달려온 유럽은 이러한 반복되는 폭력의 악순환을 단호히 거절하고 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의 테러주의자들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강경정책 일변도로 나가는 이스라엘 샤론정부에게도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다. 확실한 이스라엘의 후견인으로 서있는 미국과 구별되는 유럽의 이 양비론적인 자세는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 특히 미국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인들 또한 이러한 유럽정책에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대표적으로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로서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엘리위젤은 이스라엘의 강경정책을 지지하면서 이에 대한 유럽인들의 비판을 반유대주의로 몰아가고 있다.(04년4월28일 베를린연설) 이스라엘정부 역시 이런 식으로 자신들의 정책에 대한 비난을 반유대주의로 몰아가면서 홀로코스트와 반유대주의를 정치도구화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비판 자체가 반유대주의는 아닐지라도 유럽 내에 여전히 뿌리 깊이 남겨져 있는 반유대주의의 불씨에 부채질하는 것이 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유럽의 다른 고민이다. 2차대전 이후 꾸준히 늘어난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과 경기침체에서 따라오는 실업율의 증가는 극우주의자들의 목소리를 크게 만들고 있다. 유럽연합회원국인 오스트리아에서 2000년 2월 과거 히틀러와 같은 극우분자인 하이더의 정당이 연정에 참여함으로 큰 우려를 자아내었다.
각 나라에 이러한 극우성향의 정당들이 정치적인 발판을 마련하면서 2차대전 이후 숨겨졌던 반유대주의가 다시 조금씩 고개를 쳐들고 있다. 이들을 통한 유대인 회당과 공동묘지에 대한 훼손행위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유럽전체에 흐르는 이스라엘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는 바로 반유대주의가 젊은이들 사이에 확산되는 빌미로 악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 두 사이에서 매주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협력을 위한 모임의 독일 측 기술위원회 (Der Deutsche KoordinierungsRat der Gesellschaften für christlich-jüdische Zusammenarbeit)가 발표한 “근간의 점증하는 중동의 갈등에 대하여”(02년 4월10일) 라는 글을 보면 이러한 분위기를 충분히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여기서 팔레스타인의 극단주의자들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강압정책으로 양국의 민간인들이 피해를 보는 것에 대해서 유감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언론들이 이스라엘을 잔혹한 진압군으로, 반면에 팔레스타인인은 단순한 희생자로 보여줌으로 한쪽의 입장만을 강조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반이스라엘 분위기를 조장하고 있고, 이런 분위기는 반유대주의 진영에 도구화될 수 있고, 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문제시하고 있다.
“중동에서의 독일과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한 그룹”(Deutsch-Israelischer Arbeitskreis fuer Frieden im Nahen Osten) 역시 중동 분쟁의 긴장에 대한 설명에서(02년 4월 16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폭력정치를 비판하는 하면서도 그들의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이 반유대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스라엘정부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아울러 반유대주의에 대한 유럽의 우려는 올해 4월 29일에 유럽과 북미, 중앙아시아 지역 55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안보협력회의(OSCE)채택된 베를린선언문에 잘 감지될 수 있다. 여기에 참가한 600명의 대표들은 “반유대주의나 종교적 인종적 증오와 편견에 의해 유대교 예배당이나 종교시설, 사원을 상대로 한 모든 형태의 공격”을 비난한다고 밝혔고 각 회원국이 어린이들에게 반유대주의와 홀로코스트에 대해 교육할 것과 반유대주의를 비롯한 종교적 인종적 증오심에 의한 범죄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고 제출할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반 이스라엘과 반유대주의를 연결지으려고 하는 미국의 주장은 유럽 국가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가는 글
유럽인들은 누구보다도 중동의 평화를 원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 역시 평화를 배우기 위해서 너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홀로코스트의 상처는 유럽의 상처이고 또한 인류의 상처이다. 인간에 대한 대학살극은 전후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계속해서 일어났고, 지금도 역시 지구촌 저편에서 계속되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유럽인들만이 아닌 우리의 아픔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럽사회와 교회의 실패는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귀한 교훈이다.
선교와 관련해서 우리의 선교 속에 평화가 담기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사회적 평화를 너무 우선하는 가운데 유대인에 대한 선교 자체를 터부시하는 유럽의 많은 기독교인들의 지나치게 진보적인 사고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유대인들도 반드시 기독교인이 되어야 된다는 생각이 발전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을 미워하고 배타시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신앙은 아닐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힘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들에게 사회적인 불이익을 주고 폭력을 통해서라도 그들을 항복시키려고 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미 거기는 참된 선교의 정신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선교는 분명 주님이 주신 지상명령이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역이라고 하는 근본 본질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본질의 문제는 쉽게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선교전략, 선교정책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다. 복음 전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영혼과 그 전인격을 사랑하며, 복음을 받건 안받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한 인간으로서 그를 천하보다 귀하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선교사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신앙의 본질적인 자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