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세계에서 우리만큼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가족 간에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불편이나, 희생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자식의 조기유학을 위해서 아내와 떨어져 사는 기러기아빠들도 많이 있다. 서양사람들에게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가족은 공동의 운명체라고 하는 생각이 우리 뼈 속 깊이 박혀있다.
그러나 그 공동체의식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면 급격하게 사라져버린다. 가족을 벗어나면 너무도 쉽게 나와는 상관없는 남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사회는 넓은 의미에서 하나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사회를 단순히 이익사회(Gesellschaft)로 본 퇴니스와 달리 스위스의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사회를 시민공동체라는 말로 사용했다. 공동체라는 말은 구성원 서로가 알게 모르게 서로의 삶과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유기체라고 하는 말이다.
어느 사회든지 공동체를 힘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사기꾼, 도둑놈, 파렴치한 범죄자들과 아울러 이기적이고, 자기만을 아는 사람들은 항상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든지 또한 배려가 깊은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배려란 남을 깊이 사려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많을수록 자연 그 사회는 따뜻하게 되기 마련이다. 목표를 향해서 달리고 열심히 일하고 책임있게 사는 모습이 우리 사회를 활기차고 원활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작은 격려의 말에서부터 시작해서 도로 위에서의 양보운전등등 배려라는 것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다.
오늘 극심한 경쟁과 이기적인 사회 속에서 나는 성경에 있는 아름다운 배려의 권면을 소개하고 싶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너의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너의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너의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레 19:9-10]
어느 사회에나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배려의 명령이다. 그들은 경작할 밭도 논도 없이 사람들로 그저 품삯을 받아먹고 사는 이들이었다. 이들을 위해서 일부러 모퉁이 부분을 추수하지 말고 흘려진 곡식과 열매를 내버려두라고 하신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배려인가?
오늘 우리 사회에도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좋은 직장을 갖고 다시 회생할 수 있는 길을 정책적으로 구조적으로 만들어가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끊임없이 그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밭에 곡식과 열매를 남겨두는 배려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