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사회는 유능한 엘리트들도 있고, 그럭저럭 살아가는 중간층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인 약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사회적인 약자들이란 가난하여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기 어려운 병자, 장애자, 노인들 또는 돈을 벌려고 이웃 나라에서 온  외국 노동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나 다 있기 마련이다.

대체로 이런 사회적인 약자는 자기 힘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스럽고, 짐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종종 성장과 발전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은 소위 왕따의 대상이 되곤 한다.  국가의 정책 때문이건, 아니면 국민들의 가치관의 문제이건 어떤 이유에서건 약자가 보호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오늘날 학교나 사회 일각에서 왕따 문화가 성행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든 사회인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 있을 때에 한번은 우리 딸아이가 수학여행을 갔다.  독일 가까운 화란의 어떤 작은 마을이었다. 즐거운 수학여행 중에 불상사가 일어났다.  두 아이가 여행 도중 그만 쫓겨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선생님은 두 아이의 부모에게 연락을 해서 이 얘들을 데려가라고 했다.  한 아이의 부모는 자기가 바쁘니 기차를 태워서 보내라고 했고, 한 아이의 부모는 화란 마을까지 차를 몰고 왔다. 그리고 왜 자기 애를 집으로 돌려보내는가를 선생에게 물었다.  그 때 선생님이 설명해 주었다.

이 마을을 중심으로 주변을 돌아보는데, 중요한 교통수단은 자전거였다. 반의 모든 아이들이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선생님과 함께 이동하면서 다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반에 자전거를 못 타는 토마스라는 아이가 하나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독일에서는 국민 학교 때, 자전거 면허시험을 보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는데, 이 토마스는 그 누구나 타는 자전거를 탈 줄을 몰랐다.  선생님은 토마스를 위해서 수레를 빌려와서 자기 자전거 뒤에  달고 거기에 태우고 다녔다. 선생님 뿐 아니라, 아이들 전체에게 토마스는 갑자기 좀 성가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동 시간이 더디고 번거러웠다.

그런데 가운데 바로 이 두 아이가 토마스를 비웃으면서 괴롭혔다. “자전거도 못 타 바보 같으니라고”  쉽게 말하면 왕따를 시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두 아이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토마스를 괴롭혔다. 그러자 선생은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설명을 들은 부모는 선생에게 항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선생님이 자기 자녀에게 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면서 동조했다.  그리고 자기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우리 딸에게 들으면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밑바닥에 깔린 건강한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역시 왕따문화가 성행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 사람들은 갈릴리 지역을 하시했고,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사두개파,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세리나 창녀 등의 하층민을 사회 속에서 소외시켰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떠하셨는가? 그는 오히려 스블론 납달리 지역 즉 이방의 갈릴리에서 사셨다. 이로 인하여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로 빛이 비취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다. 주님이 보여주신 행위는 오늘날 그의 제자 된 우리들이 우리의 사회 속에 있는 약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는 본이 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자체 역시 부족하고 약한 자들의 모임일 뿐 아니라, 그러한 약자들을 보살피고 섬겨야할 공동체이다.  자칫 우리 역시 사회가 주장하는 경제논리, 성장논리를 그대로 답습하는 가운데 왕따문화를 좇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