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추고도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모든 불행의 여건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방글라데시국민이라고 하는 사실이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우리의 삶의 질은 과거 우리 부모 세대에 비해서 월등히 높아졌습니다. 1955년 이승만정부시절 부흥부가 부흥 5개년 계획안을 발표했는데, 1960년도 국민소득 목표가 100달러였습니다. 그런데 50년이 지난 올해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2만 달러시대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거 우리 조상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부모세대보다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행복은 정말로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내면의 핵심은 바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예수님이 한 말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며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눈, 즉 사물을 바라보는 관(觀)이 행복의 열쇄입니다. 가령 탁자 위에 컵이 있고 거기에 물이 반 정도 차있다고 합시다. 이것을 보고 “물이 반밖에 없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이 반이나 있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소설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어부 두 사람이 그물질을 하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올립니다. 죽기 일보직전의 사람을 보고 한 어부가 고개를 흔들면서 말합니다. “에이 반쯤 죽었구먼.” 그러자 이를 바라본 다른 어부가 말합니다. “아니, 반쯤은 살아있는 데.” 꼭 같은 사실을 둘 다 맞게 표현한 것이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눈은 전혀 상반된 것입니다. 이 죽기 일보직전의 사람은 “아직 반쯤은 살아있다”라는 시각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구출되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현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밝은 것이 있고, 어두운 것이 있습니다. 형통한 때도 있고, 고난의 때도 있습니다. 이 사회도 그렇고, 개개인의 삶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는 항상 어두운 쪽을 보면서 부정적인 사고를 갖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뭔가 잘 안 될 것 같고, 큰 문제가 생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평생 두려움에서 살아갑니다. 그 눈이 건강하지 못함으로 온 몸이 어두운 것입니다. 만일 자신이 지금 당면한 어두운 현실, 그리고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난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도리어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그는 정말 세상을 행복하게 살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남의 나라 전쟁에 용병으로 참가했다가 전쟁 포로가 된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함께 잡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절망과 비탄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을 잃었고, 가족을 다시 만날 수도 없으며, 여기서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반대로 포로가 되어서 이제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며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포로 생활이 글을 쓸 수 있는 ‘여가’를 보장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감옥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을 틈틈이 동료들에게 읽어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소설이 바로 유명한 ‘돈키호테’이며 그 포로는 다름 아닌 ‘세르반테스’였습니다. 긍정의 눈은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모든 눈을 긍정으로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역사와 인간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 정도가 아니라, 그의 사랑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안 되는 일, 고난의 일도 더 좋은 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줍니다.
행복의 열쇄 - 바로 이 긍정의 눈에 달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