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한 웹사이트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사이트는 정부와 기업, 단체의 불법·비리 등 비윤리적 행위를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위키리스크로 그 설립자는 호주 출신 전문 해커였던 줄리언 어센지였습니다.

 

이 사이트의 지속적인 폭로로 그동안 감추어졌던 수많은 정보들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과거 세상에 알려진 것 중에 거짓된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물론 덮어지고 감추어져야할 것까지 다 까발리다보니 적지 않은 부작용이 야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권력의 힘으로 사실을 호도하려고 했던 국가기관과 언론을 대항하여 진실을 밝혀냄으로 오히려 세상을 밝게 하고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그래서 2008년 <이코노미스트>의 뉴미디어상, 2009년 국제사면위원회의 인권부문 보도기관상등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과 지지를 얻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참과 거짓을 잘 분별한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되고 선동되는 거짓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는 거짓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에게 붙잡혀서 끌려갔던 대제사장의 뜰과 빌라도법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열린 산헤드린공회에서 1차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이 열리는 대제사장의 뜰은 한마디로 거짓으로 가득 찬 세계요 거짓의 모든 것이 드러나는 곳이었습니다.

 

거짓은 크게 두 가지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남을 죽이려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이 뜰에 모인 자들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거짓증인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합니다. 소위 권력의 전형적인 수법이지요. 그러나 조작된 증언은 금방 거짓임이 드러날 만큼 서로 상충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가 살려고 하는 거짓말입니다. 대제사장의 뜰에 몰래 들어온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그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에게 세 번이나 들켰습니다. 그때마다 베드로는 자신의 스승 예수님 가리키며 “나는 저를 모른다.” “나는 저와 아무 상관이 없다” 면서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서, 심지어 저주문까지 써 가면서 말입니다. 죽음이 두려웠기에 그야말로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거짓이라는 것은 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거짓은 마귀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한마디로 거짓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여기 유대인들처럼 자신이 적으로 여기는 자를 죽이려고 온갖 거짓을 서슴치 않습니다. 국가권력부터 이 면에서는 선수입니다. 무슨 간첩사건이라고 잡아들이고 심지어 사형까지 시켰지만, 세월이 지나고 나서는 조작극이었음이 밝혀진 것이 한 둘이 아닙니다. 수많은 공권력의 거짓은 민중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거꾸로 오늘날에 와서는 정권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서 신문이나 방송등도 교묘하게 조작된 거짓을 내놓아 국민들을 호도합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가 살기 위해서 한다는 거짓말은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수억, 수십억의 뇌물을 받고도 돈 한 푼 받지 않았다고 호언하는 정치인들, 거짓으로 비자금을 조성해서 뿌려대는 사업가들, 거짓으로 국민의 세금을 빼돌리는 공무원들, 가짜원산지표기, 가짜 학력, 거짓 이력서, 거짓추천서, 거짓성적표, 거짓보고서 등등 살기 위해서 또는 더 잘 살기 위해서 거짓의 자리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사회는 그 무엇도 믿기 힘든 불신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심령이 상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심령이 상처받은 롯이 타락했던 것 같이, 오늘날 거짓이 만연한 한국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으로 쉽게 타락하게 됩니다. 거짓의 영에 쉽게 사로잡혀 거짓말에 익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길이 아닙니다. 여기 예수님을 보십시오. 자신을 모함하는 거짓증언들에 대응하지 않고 침묵하시던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는 대제사장의 질문에 당당히 대답하십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결국 이 대답으로 신성모독죄로 정죄되어 빌라도에게 끌려갔고 십자가 죽음을 당하였지만, 주님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진실은 위기와 고난을 자초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진리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거짓말은 우리에게 이제 어울리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명합니다.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엡 4:25)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이 거짓을 멀리한다면, 교회가 진실의 옷을 입는다면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믿을 수 있는 사회, 정직이 통하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비록 진실에 어려움과 시련이 따라온다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에 서신 주님과 같이 언제나 진리에 설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거짓된 세대에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입니다. 그럴때 비로소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불릴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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