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평화 우리의 평화


  [이 글은 교갱협(교회갱신협의회) 논단 (2014.07.23) 에 게재된 것입니다.]

 

지난 628일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부부가 한 세르비아 청년에 의해 저격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날을 즈음해 유럽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은 이 비참한 대량살상 전쟁을 되돌아보면서 다시금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이 저격 사건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지배를 놓고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와 갈등이 첨예된 가운데 일어난 것이다. 이 두 나라의 배후에는 범슬라브주의를 앞세우는 러시아와 범게르만주의를 앞세우는 독일의 제국주의가 있었고, 비스마르크 이후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는 독일을 견제하려 했던 영국과 프랑스제국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전역이 전화에 휩싸였고, 3,000만명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었다.

그러나 이 비참한 전쟁의 교훈을 제대로 읽지 못한 유럽에서는 불과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전 세계가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끌려들어가면서 약 6억명이 목숨을 잃는 전무후무한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다.


돌아보면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융 연구소 소장 제임스 힐먼에 따르면, 역사시대 5,600여 년 동안에 문자로 기록된 전쟁은 모두 14,600여건에 달한다는 것이다. 해마다 2-3건의 전쟁이 터질 정도로 전쟁은 자주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항상 명분과 정당성이 강조되었다. 정치인들은 영토, 민족, 이념, 자국의 안전, 전략적 가치 등등 나름대로 명분을 내세우면서 이 전쟁이 꼭 필요한 것처럼 선전을 했지만, 대부분이 해서는 안 되는 전쟁들이었다.

어거스틴이 게르만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쟁을 의로운 전쟁”(bellum iustum)이라고 칭한 이후 서양제국들은 전쟁을 일으킬 때마다 이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대부분이 의로운 전쟁이 아닌 불의한 전쟁이었고, ‘거룩한 전쟁이 아닌 추악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피해자는 군인보다도 오히려 선량한 시민들이었다.


대개 전쟁이 발발할 때는 어떤 특정한 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만, 대부분은 그보다 본질적인 동기를 갖고 있다. 그것은 호전적인 정치인들이고 평화의 가치를 모르는 극우세력들이다. 평화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거짓말과 선동이 난무하고 언론이 여기에 부화뇌동하면서 일반국민들도 점차로 분별력을 잃어가게 된다.

최근 이스라엘의 가자침공도 마찬가지이다. 소년들의 유괴살해 사건을 계기로 하마스의 로켓포가 이스라엘 영내로 발사되었고, 이를 빌미로 해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침공하였다. 722일로 민간이 부상자만 이미 600명이 넘어가고 있다. 국제사회의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이번 기회에 하마스를 무력화하고 로켓포기지와 땅굴등 위험요소를 발본색원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어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사상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2008년 연말에 비슷한 방식으로 가자지구를 침공해서 7천명이 넘는 민간인 사상자를 내었다.


물론 짧게 본다면, 바로 코밑에서 자기 영토에 로켓을 쏘아대고, 땅굴을 통해서 적이 침투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은 국가안보를 위한 정당한 선택처럼 보여 진다. 이런 논리를 갖고 미국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근원적인 동기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수차례의 중동전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영토에서 쫓겨난 팔레스틴인들은 아라파트를 중심으로 PLO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들은 과격한 테러와 공격을 서슴치 않으면서 이스라엘과의 대결국면을 지속해갔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은 계속되는 분쟁이 답이 아님을 깨달아가면서 국제사회의 중재 가운데 마침내 1993오슬로협정이라 불리는 평화조약을 맺었다. 완벽한 협정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스라엘군이 궁극적으로 가자와 서안에서 철군하는 것을 결의하는 등 두 국가 해법이 제시되었다. 이런 평화조약이 가능했던 것은 서로의 이익을 조금씩 양보함과 아울러 서로에 대한 신뢰를 가지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주역이 된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의 라빈총리 페레스외상은 그 다음해에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던 중동의 땅에 평화의 깃발이 꽂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과 아랍의 평화주의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세계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5년 이스라엘의 과격청년에 의해 라빈이 암살되고 현재 수상으로 있는 네탄야후를 비롯한 매파들이 집권하면서 모든 것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팔레스틴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유대정착촌을 계속 건설해갔다.

이스라엘 매파들이 오슬로협정을 무시하는 정책을 펴자, 팔레스틴에서도 평화주의자들의 힘이 약화되고, 하마스등의 과격단체가 득세하면서 가자지구에서 집권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이들과의 대화를 일체 거부하면서 반드시 말살시켜야할 적으로만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전쟁은 이스라엘과 가자가 모두 호전적인 권력자들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이스라엘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승리하겠지만, 그들 역시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라빈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폭력은 이스라엘의 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이스라엘은 분열되고 고립될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어리석게도 이 길로 가고 있다. 결국은 전쟁의 고통 가운데 다시금 평화를 갈망하면서 평화주의자들이 다수가 될 때까지 이 분쟁은 종식되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계에서 중동 못지않게 전쟁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가진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이다. 유대인과 아랍인이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고 대립하는 것처럼, 남한과 북한 역시 휴전선을 마주보면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인종과 종교로 대립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념으로 대립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 역사와 핏줄과 언어를 공유하고 있는 한민족이다. 그러므로 남한과 북한은 적이면서 동시에 하나가 되어야할 민족이다. 이 두 가지의 어느 하나도 무시할 수 없지만, 어느 쪽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생각은 달라진다.

북한은 말할 나위도 없고, 우리나라 안에도 호전적인 사람들이 많다. 북한을 철저한 적으로만 여길 뿐, 같이 공존해야할 평화의 대상자로 여기지 않는다. 특별히 기독교인들 중에는 일반인들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북한정권을 마귀집단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마귀집단일진대 이것은 전쟁과 타도의 대상이지 타협과 대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국민 모두는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원칙에 서있어야 한다. 전쟁도 불사한다는 사고방식에서는 작은 군사적 충돌이 전면전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은 우리와 우리 자녀세대 모두를 불행하게 하는 길이다.

우리가 전쟁하지 않으려면 평화공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대화와 교류를 해나가는 것이다. 상대방을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하고 지혜를 모아 교류의 채널을 확대해 가야 한다. 이전 정권부터 정부는 군사적인 정치적인 사건을 빌미로 민간교류를 단절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정치적인 사안과는 별도로 민간교류의 창구는 닫는 일이 없이 지속시켜야 한다.


한국교회는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누구보다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독일교회가 동서독 갈등의 화해자로 서면서 평화로운 통일의 주역이 된 것 같이, 한국교회도 한반도에 내재하는 무수한 갈등의 화해자로 서면서, 평화로운 통일을 이루는 평화의 사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