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할머니 세 분이 미국 하원 아태소위의 청문회에 출두하여 증언을 했습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시 일제에 의해 끌려가서 위안부로 희생되었던 두 명의 한국인과 한 명의 네덜란드인이었습니다. 민주당 혼다 의원 등이 1월 31일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가 저지른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 사건’으로 규정하고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등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내서 이뤄진 청문회였습니다.
그런데 심히 유감스러운 것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일본정부는 최고의 로비스트들을 미 의회에 보내어 이 결의안이 통과되지 못하도록 온갖 방해를 놓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심지어 1993년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이 담화를 통해 위안부 모집에 일본 관리들이 직접 개입했음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했지만, 오늘날 우익성향의 일부 각료와 정치인들은 이것까지도 되돌려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세계 최강의 경제대국을 이룬 나라이고, 높은 시민의식과 민도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나라로 지목받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과거 그와 같은 야수적인 행위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다보니, 거짓과 은폐뿐 아니라 왜곡된 역사해석과 자기합리화의 틀에 갇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과거는 결코 과거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진실에 대한 솔직한 인정이 없는 한 현재를 그 잘못된 과거와 단절시키기는 어렵습니다. 이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전후 선진국들 중에 가장 우경화된 사회가 되게 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신뢰는커녕 여전히 불신과 불안을 안겨주는 나라로 인식되게 하는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한 나라나 개인이나 간에 자신의 지은 죄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아마도 나의 잘못과 실수를 인정함으로 얻게 될 경제적인, 명예적인 손실 내지는 자존심의 상처를 두려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을 들먹거리고, 남도 다 하는 일이라는 등의 자기 합리화로 덮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지나가면 왜 지나간 과거에 집착 하냐고 도리어 분노합니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모호한 태도나 자기합리화의 통로를 타고 그 죄는 다시 현실에서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1995년 8월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이 일본에 초청되어 “종전 50년의 독일과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어떤 단어로 사죄를 해야 하는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죄냐, 유감이냐, 통한의 염이냐 등등. 어떤 기자가 이에 대해서 바이체커에게 조언을 구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가 갖는 경험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미안하다는 사죄의 말은 자주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유효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마음으로 진실하게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어떤 용어를 쓴다고 해도 결국 단순한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스위스의 저술가 아돌프 무쉬그가 97년 독일의 저명 주간지 슈피겔지에 낸 글은 의미심장합니다. “(과거를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마치 마취가 풀릴 때처럼 먼저 고통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만이 올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정말 옳지 않습니까? 잘못을 인정하는 것에는 종종 아픔이 따르지만, 그렇게 할 때만이 우리는 바른 현실로 돌아올 수 있고, 그럴 때 우리에게 바른 미래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대방이 누구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용기입니다. 참된 신앙도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