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회적인 공의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좋은 사회, 좋은 국가란 어떤 것일까라고 물을 때에, 좀 포괄적이지만 무엇보다도 공의가 바르게 시행되는 사회라고 말한다면 크게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신학을 대표하는 독일의 게하르트 폰 라드는 공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세다카’(sedaka)란 ‘우리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동물을 대하고 더 나아가 자연 환경을 대하는 척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란 사회의 모든 관계를 엮어가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요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공의는 하나님이 그가 허락하신 모든 국가에 요구하시는 가장 핵심적인 척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국가의 최우선 과제는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암 5:24]. 정의를 실종한 사회는 아무리 GNP, GDP가 높다고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강한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문제를 다룰 때에 다른 무엇보다도 언제나 사회 공의적인 관점에서 국가의 건강성을 살피고 통치자가 이를 바르게 실현하고 있는가를 눈여겨보아야 하고 그들에게 이것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바 사회적인 공의란 무엇인가요? 종교개혁자 칼빈은 각 나라의 상이한 법 구조의 기초에는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공의가 자리잡고 있다면서 aequitas라고 하는 그 보편적 공의가 모세의 율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공의의 핵심을 칼빈은 예레미아 22:3로 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 말씀이 가리키는 것처럼, 성경 속에서 사회적인 공의의 초점은 언제나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권력의 배려에 맞추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국가에 권력을 주시고 권력자를 세우신 것은,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는 것 다시 말해서 힘없는 자를 힘 있는 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약자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돕는데 국가의 권력을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식년이나 희년 등은 사회적 약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제도이고, 이 제도는 많이 가진 자의 희생을 전제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희생이라 할 수 없는 것은, 가진 자들이 이처럼 율법을 시행할 때, 하나님은 그들이 보다 더 잘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국가에 요구하는 공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적 정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건강성을 재단하는 가장 근본적인 척도입니다.
이러한 척도를 갖고 우리 사회를 볼 때, 갈수록 심화되는 빈부격차의 해소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안고 있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나라는 2007년 기준 최상위 계층이 최하위계층보다 평균 4.7배 이상 소득이 많아 OECD 국가 중 미국(4.85배)에 이어 두 번째로 심한 빈부격차를 보이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것은 10년 전 3.72배에 비해 크게 높아진 것으로 해가 거듭할수록 소득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감안할 때에 이러한 소득의 격차가 ‘富와 가난의 대물림’현상으로 고착되어 가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사회는 성장과 경쟁을 앞세우면서 복지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부자들을 위한 감세를 중단하고 복지예산을 더욱 많이 늘려서, 사회의 약자들로 하여금 보다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나라가 보다 공의로운 국가, 건강한 국가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