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안녕하세요. 오늘은 국제사회에서의 책임의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과거 아주 미약한 약소국이었습니다. 1945년 오랜 식민지에서 해방되었고 재건의 여유도 없이 6.25가 일어나 온 국토가 피폐되면서 우리는 외국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였습니다. 1945년부터 90년대 후반까지 우리가 받은 해외원조는 127억 달러, 현재 가치로는 약 70조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반세기를 넘기면서 우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와 선진국과 신흥국으로 구성된 G20에도 가입하는 등 13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입니다.
가난하고 못살아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때는 어느 누구도 책임을 묻거나 지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규모가 커 진 만큼 이제 세계는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그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의 놀라운 성장의 밑바닥에 외국에서 오는 원조가 있었던 만큼, 이제 그 빚을 갚으려고 하는 채무의식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26일에 우리나라가 OECD내의 DAC(개발원조위원회)의 24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들을 돕는 일에 본격적으로 동참함으로 국제사회에서 책임의식을 갖는 나라로 한 단계 올라서게 되는 것입니다.
아울러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 정부가 202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CO₂)를 ‘2005년 대비 4% 감축’하고 2020년 배출전망치보다는 30%를 감축한다는 목표를 확정한 것입니다. 현재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 9위에 이르고 있음을 감안할 때에 부족한 감이 없지 않으나, 미국과 중국 등 많은 나라들이 서로 책임을 미루는 상황에서 개도국에 요구된 최고 수준의 목표를 이처럼 자발적으로 제시한 것은 의미있는 일입니다. 이는 우리나라가 세계의 환경문제에 책임 있는 국가로 동참하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입니다.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은 이러한 결정들로 인해 간접적으로 얻게 될 경제적인 이익, 국격의 변화 등을 말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 스스로가 국제사회 속에서 보다 높은 책임의식을 가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책임은 낭만적인 것이 아니고,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에 대한 원조를 늘릴 경우 우리국민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이산화탄소를 감축하는 과정에서 산업계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고, 일반 시민들에게 각종 환경세가 부여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이러한 부담을 줄이는 방법을 다각도로 강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그 부담을 끌어안을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중심적인 눈에서 너를 바라보는 눈으로, 우리민족 중심적인 눈에서 세계 공동체를 바라볼 수 있는 눈으로 안목과 사고의 지평을 넓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책임을 함께 지려고 하는 적극적인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책임은 특별히 기독교윤리의 가장 중요한 핵심가치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 뢰그스트룹은 “19세기 신학자들은 ‘의무’를 복음적 윤리의 중요한 요소로 이해했지만, 20세기 신학자들은 ‘책임’을 가장 중요한 핵심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 책임은 수혜를 받는 사람을 위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그 책임을 부여한 자에 대한 책임이 먼저입니다. 루터는 이런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부모는 아이를 위한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러므로 그 책임은 아이를 위한 것이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이다”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고 환경을 지켜나감에 사람들은 먼저 수혜자를 위한 책임을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난한 자와 자연을 돌보는 것을 우리의 의무로 명하신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입니다. 이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 그리고 ‘세계 공동체를 위한’ 책임을 갖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이러한 정책들을 실천하면서 국민들에게 요청하는 부담과 희생에 대해 “예”라고 말하면서 기꺼이 동참하도록 합시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