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또 한해의 시간을 허락하셨습니다. 일 년이라고 하는 시간의 달란트를 맡기신 것입니다. 이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의 면전에서 그를 섬기며 행하는 모든 삶을 가리킵니다.

우선 예배하면 우리는 주일에 교회당에서 드리는 공적인 예배를 생각하게 됩니다. 구별된 시간에 구별된 장소에서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 속에서 우리는 가장 강하게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 앞에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을 갖고 서며, 성령의 치유와 회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중예배는 일주일의 한 시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일주일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후 우리는 교회당과 회중을 떠나는 것이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 속에서 동일하게 주님을 모시고 그 분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하며, 맡겨진 일에 충실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기며,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가 되는 것 이것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드려야할 삶의 예배 즉 영적예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는 또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경건이라는 것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 가정이나 장사, 사업, 관계하는 사람, 교회의 일등 개인적인 범주 안에 가두기 쉽습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말씀을 적용하고 순종하면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과거 독일의 경건주의에서 나타나는 소위 소시민적인 신앙이었니다. 이러한 소시민적인 신앙은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했고, 그것은 후에 나치가 등장하는데 적지 않은 공헌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런 개인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개인의 삶은 사회전체 구조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고 싶다고 하는 모든 부모의 꿈은 가정교육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교육을 만들어가는 국가의 교육정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일해도 불의한 경제구조는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고, 지역균형발전이냐 수도권우선정책이냐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여건과 환경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게를 얻어 열심히 살려고 했던 그저 평범한 상인들이, 국가 개발정책의 왜곡된 과정에서 일어난 용산참사의 비극 속에서 불행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정치와 정치인, 국가권력이 개인의 행복과 불행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의 실제적인 예들을 열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행위는 개인 경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의 삶을 규정해 주는 정치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포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정이나 직장, 대인관계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놓고 고민하듯이,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놓고 어떻게 하는 것이 보다 합당한 하나님의 뜻인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온 우주에 미치고 있습니다. 교회와 가정을 성결하고 바르게 세워가려고 하듯이, 국가사회를 바르게 세워가려는 해야 하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드려야 할 정치적인 예배입니다.

칼빈주의자 존 녹스의 지도하에 1560년 새롭게 세워진 스코틀랜드의 신앙고백서 중 제 24항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이러한 시민의 의무를 말하고 있고, 이것을 칼 바르트는 “정치적인 예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올 한해 우리는 교회 회중 가운데서의 예배, 개인의 삶 속에서의 예배 그리고 국가사회영역 속에서의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가 주인 되신 이 세상을 보다 의롭고 성결하게 빚어가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