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제 두주 앞으로 다가온 성탄절이 우리 시대에 갖는 의미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정확히 언제 태어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매년 연말에 가까운 12월 25일에 주님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심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성탄 4주전부터 첫 번째 강림절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각 도심지마다 성탄시장이 열리면서 축제분위기가 서서히 달궈집니다. 이것이 성탄전야까지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성탄을 기다리고,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사느라 바쁘게 다니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 기간의 매출은 일 년 매출과 맞먹을 만큼 비중이 있고 그래서 성탄절에 가장 즐거워해야 할 사람들은 다른 누가 아닌 상인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헉슬리는 크리스마스는 우리 자본주의 경제의 하나의 주된 도매상이라고 비꼬아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탄이 상업화, 세속화되는 가운데서 우리 교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탄에 담긴 교훈을 되새기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그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돌아보십시오.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황제는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려는 명목으로 사람들에게 호적을 명하였습니다. 이에 요셉도 정한 기한 안에 호적하기 위해서 만삭이 된 아내 마리아와 함께 무리하게 고향 베들레헴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이로 인해서 예수님은 그곳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웅장하고 화려한 이야기가 아니라, 약하고 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의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태어난 그 소식은 다른 누구보다도 그 지경에서 양을 돌보던 목자에게 제일 먼저 전해졌습니다. 랍비문헌에 따르면 당시 목자는 밤낮 없이 양을 돌봐야했고, 그 일은 냄새나고 더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천한 직업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었기 때문에 재판석에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었고, 시민권도 인정받지 못하는 하층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하면서 그들을 이 축복의 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성탄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성탄의 주인공이 바로 이러한 가난한 자들이고, 눌리고 억압받는 자들이고, 고통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우리가 즐기는 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자들을 돌아보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세계는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화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인의 상위 2%가 전체 부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인구 중 1%의 부유층의 소득이 빈곤층 57%의 소득과 맞먹을 만큼 부의 편중은 극심합니다. 60억 지구인의 여섯명 가운데 한명은 하루 1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연명하고 있고, 2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사는 사람은 세계인구의 절반에 가깝습니다. 20억명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10억명은 마땅한 식수설비가 없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사는 편인 우리나라 역시 빈곤층 비율이 같은 수준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 높은 편입니다. 그런데도 GDP 대비 사회지출은 OECD에서 최저수준으로 잡고 있는 15%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도시나 농촌에서 극빈자를 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외에 외국인노동자, 탈북자, 독거노인, 보육원생, 모자원생, 장애인 등등 수많은 약자들이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충분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강림절과 성탄절이 있으면서 또 한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달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성탄트리와 장식들은 하나의 기독교를 상징하는 문화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 세상을 밝히는 것은 주님이 세우신 성탄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의 긍휼입니다.
이번 성탄은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서글픈 주인공들이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따뜻한 축제가 되기를 바라며, 이러한 성도와 교회의 사랑을 통하여 성탄의 은혜가 온 세계에 널리 퍼져 나가기를 기대합니다.
애청자 여러분, 다음 이 시간까지 평안하십시오.